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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과의례
    Titania 2021. 2. 17. 18:29

    ▶BGM

    일러두기 1. 해당 로그는 동맹혼관을 바탕으로 엔딩시점에서 약 16년 뒤의 시기를 그렸음.
    일러두기 2. 해당 로그는 과거 회상격 외전이 딸려있음.





    훈훈한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을 아이들의 움직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드는 찰방거리는 소리와 식은 물을 다시 덥히기 위해 온수를 쏟아붓는 콸콸거리는 소리, 그리고 웅웅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까지 엉키니 제법 야단스러웠다.

    티타냐는 욕실 바깥에서 그 소란을 엿들었다. ‘아, 형!’ 둘째 제리코가 첫째 라비에게 짓눌리기라도 했는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났다. 라비는 페트라를 닮아 원래도 체구가 또래보다 좋았고 빠르게 자랐다. 하녀가 둘을 떼어놓은 건지 아니면 막내 아스틴이 둘 사이로 파고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다시 웃음소리가 났다. 평소처럼 장난치는 꼴을 보아하니 다 회복한 모양이지. 페트라는 아이들에게 대단히 관대했고 대체로 티타냐가 고삐를 죄는 만큼 더 풀어주는 편이었지만 한 번 사달이 났다 하면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불호령을 내렸다. 실수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알면서도 호승심과 과시욕, 고집을 버리지 못해 일으킨 사건이라 남편도 드물게 야단을 친 모양이었다. 더구나 티타냐는 남편이 왜 더 호되게 굴었는지 그 심정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에게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래도 모든 일이 끝난 이상 이제 겨우 열 살도 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포옹이 필요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티타냐는 주먹 쥔 손으로 문간을 똑똑 두들겼다. 잠시 소요가 가라앉았다. 물을 붓던 하녀가 마님! 하고 부르며 달려왔다. 하녀가 머리를 정리해주는 사이 티타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신발을 벗어 한켠에 밀어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욕탕으로 다가갔다. 물이 튀어 바닥이 미끄러웠다. 아랫것들이 붙들고 빡빡 씻겨서 소금기를 다 지워낸 아이들은 머리가 젖고 얼굴은 발그스름해져 끝없이 재재거리는 점까지 포함해 영락없이 새끼 홍관조 같았다. 티타냐는 이 쪼끄만 캐플란 1호, 2호, 3호 앞에 서서 욕탕 가장자리를 짚고 허리를 숙였다.

    “그래, 이제 ‘안전하고 따뜻한’ 물속에 있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개중에 그나마 나이가 제일 많아 제 어머니가 불러일으키는 매서운 한파를 가장 많이 겪어본 맏이의 눈부터 당장 도르르 굴러 시선을 피했다. 둘째가 어머니 하고 제법 처량한 목소리를 냈다. 막내는 제 형들과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티타냐의 뺨에 손을 뻗었다. 젖살이 덜 빠진 통통한 손이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져있었다. 아들들의 생존전략을 익히 아는 티타냐는 거기 넘어가 주거나 장단을 맞춰주는 일이 좀체 없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막내의 머리를 쓱 쓸어주고 자신의 치맛단을 걷어 한쪽에 매듭지었다. 종아리와 무릎이 드러났다가 금방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아직 식지 않은 물에 하반신을 담그고 욕탕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티타냐는 냉큼 제 다리에 엉겨 붙는 첫째와 둘째를 어루만져주었다. 막내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 안았다. 세 번째 아이라서 잘 알았다. 아이는, 특히 아들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컸다. 이렇게 끌어안아 품을 수 있는 시간은 짧다. 사실 이미 버거운 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크게 혼나야 할 일이지만. 이미 너희 아버지가 한바탕했다 들었고…”

    티타냐의 눈길이 특히 라비에게 오래 머물렀다. 녀석들을 찾아내 집어온 남편에게 들은 것만으로 어느 정도 정황이 그려졌다. 첫째는 성격이 호방하고 조금 무모한 구석이 있었다. 제리코는 티티의 신중함을 물려받은 건지 나이치고 제법 조심스러웠다. 아스틴은 형들이 하는 거라면 일단 따라 하고 보는 경향이 있었으니 오늘의 일은 아마 라비가 깡고집을 부리고 제리코를 부추기고 아스틴을 꼬드겨 벌어진 일일 것이다. 아니 사실 늘 그랬다. 티타냐에게 가장 많이 혼나는 것도 라비였다. 그럼에도 하나도 기죽지 않는 것은 순 페트라 덕분이었다. 페트라는 아이들이 아내에게 된통 꾸지람을 들은 날에는 꼭 잊지 않고 찾아가 부자간의 동지애를 다졌다. 느 엄마한테 억울해하면 안 돼야. 엄마가 언제 틀린 소리 하건? 비밀인데 아빠도 된통 혼나고 살었다. 어어, 요즘에도 그러냐고? 어어 그게. 하며 헛소리가 반이긴 해도 달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혼인하고도 꼬박 6년이 지나고서야 첫 아이를 얻은 페트라는 생각보다 괜찮은 아버지였다. (티타냐는 근력과 무력을 사용하는 일 외의 모든 일에서 남편을 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첫째가 자기를 똑 닮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더니, 페트라보단 티타냐의 성격을 닮은 둘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막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다 같이 오늘 일은 넘어가도록 할까?”

    티타냐의 말에 아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특히 둘째의 표정이 볼만했다.



    티타냐는 설산에서 나고 자란 동토의 딸이었다. 북방에 와본 적 없는 내륙인들이 북부 장벽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그녀에게 바다란 조금 관념적인 개념이었다. 바다보다는 호수가, 호수보다는 계곡이 익숙했고 칼리아는 그런 고인 물이나 흐르는 물이 연중 반은 얼어붙어 있는 땅이었으니 수영도 미숙했다. 페트라가 티타냐의 수영 실력을 알고서 그랬는지 혹은 미루어 짐작하기만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티타냐가 스베티리바에 온 이후로 바다를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남자는 파도를 낱낱이 알아 수평선을 사랑하는 만큼 해류를 두려워했다. 밀물이 얼마나 순식간에 들어차는지, 경계를 기점으로 조류가 얼마나 순식간에 바뀌는지, 사람의 몸이 물에서 얼마나 쉽게 긴장하는지, 특히 바다에서는 얼마나 대처하기가 어려운지, 끝도 없는 주절거림이 이어졌다. 그때에는 티타냐에게 그 모든 신신당부가 ‘주절거림’ 이었다.

    ‘그만 좀 해!’

    참다못해 그렇게 외쳤었던가. 혹은 다른 말을 덧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티타냐는 백사장 위에서 이제 자신의 남편이 된 자에게 고함쳤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그러나 입은 다물지 못하고서 뒤따라오던 커다란 남자가 멈칫거렸다. 해가 바다에 잠기기 시작한 때였으므로 온통 붉은데, 티타냐 혼자서만 새파랗게 벼린 불꽃 같았다.

    ‘바다, 바다, 바다. 그놈의 바다! 당신은 내가 정말 바닷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러려고 여기 온 것 같아?’

    페트라의 절반이나 될까 싶은 주먹을 말아 쥐고 티타냐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걸어왔다. 사령관은 예고 없이 터져 나온 감정 사이에서 표류했다. 배를 모는 건 차라리 쉬울 것이다. 눈송이인 줄 알았던 아내는 폭풍의 눈으로 자라있었고 그는 닻을 내리지도 풍랑에 몸을 싣지도 못한 채 무능력한 항해자가 되어 그 앞에 휩쓸렸다.

    ‘아니! 나는 여전히 스카디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얼어붙은 땅, 장벽, 칼리아를 지키기 위해 여기 왔어. 당신도 동의했잖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악쓰는 티타냐를 바라보는 페트라는 그때 역광 속에 있었기 때문에, 티타냐의 기억 속에는 그의 표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모처럼 입을 다문 채로 거기 그대로 서 있었고 덕분에 티타냐는 이곳에 온 이래, 아니 살아온 중 가장 큰 목소리로 가장 격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쏟아냈다.

    ‘내게서 그걸 지워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성이 바뀌면 그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았어? 착각하지 마. 나, 나는-’

    제 폐활량을 넘는 숨을 뱉다가 그대로 고꾸라질 것만 같아 티타냐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그때 저 멀리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페트라의 고개가 먼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누구의 배지? 지금 바다에 나가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지? 티타냐는 깃발의 표식을 분간하려고 애쓰다가 포기했다. 아직 익숙지 않은 문장을 판별해내기엔 이제 사위가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세웠다.

    ‘가. 누군진 몰라도 가족이 돌아온 모양인데. 가 봐야지.’

    티타냐는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며 냉소를 지우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키를 제어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뱃사람에게 길을 열어주면 냉큼 뱃머리를 돌리는 법이다. 페트라는 가라는 그 한 마디에 거부하지 못하고 항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뒤돌아봤는지 아닌지 티타냐는 모른다. 그녀 역시 몸을 돌려 해안가로 달음질쳤기 때문에.

    * * *


    돌아온 것은 페트라의 동생 플레타였다. 오래 나가 있던 것은 아니라지만 우애 돈독한 형제였으니 얼싸안고 키득거리는 웃음이 썩 보기 좋았다. 나갔던 사람과 물자가 들어오느라 항구가 왁자지껄했다. 예정보다 일찍 귀환한 연유를 묻자 먼바다에서 큰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금 무리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플레타가 짐짓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결국 정말로 쩍 입을 벌리고 하품하고 말았다. 페트라는 그런 동생의 어깨를 턱턱 두들기다가 별안간 기습공격을 받았다. ‘형수는?’ 하고 묻는데,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기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바다 나올 땐 늘상 달고 나오더니 웬일로 없댜.’ 차마 그 바다 때문에 싸웠단다 하는 말이 나오질 않아 버벅거리는 꼴이 뻔했다.

    ‘졌구만?’

    싸웠는갑다도 아니고 졌단다. 형님한테 말뽄새 하고는. 근데 이게 또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페트라는 신물이 올라오는 듯 속이 쓰려 괜히 침을 탁 뱉고 으르렁거렸다.

    ‘갸는 바다가 징글징글한가벼. 근디 맨날 산책은 해안가로 나가드라.’
    ‘걍 형이 징글징글한 거 아녀?’
    ‘뭠마?’

    페트라가 그대로 동생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고, 플레타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팔을 내려 방어했다. 막을 줄 알고 넣은 공격이었으니 기분 상할 것 없었다. 몇 번 공연한 공방 오가는 와중에 플레타가 제법 그럴싸한 추측을 내놨다. ‘거 발자국 때문 아닌가? 왜, 눈밭에서도 발자국 남잖여.’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이곳 스베티리바에는 칼리아를 떠올릴만한 그 무엇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티타냐에게 남은 거라곤 자신이 혼인식 때 전해줬던 등불에 새겨진 눈송이뿐이었다. 그 외의 겨울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페트라는 그제야 티타냐가 무엇을 감수하고 여기, 자신에게 왔는지를 어렴풋하게 느꼈다.

    * * *


    티타냐는 걸음 걷는 발끝에 두던 시선을 들어 앞쪽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해의 머리 꼭대기마저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이 이어진 발자국이 중간중간 끊겨있었다. 밀어닥친 바닷물이 그녀의 족적을 집어삼켜 지나온 길은 선의 형태라기엔 이미 많이 무너져 있었다. 모래사장은 끊겼고 이제 암반 지대였다. 돌 위에 찍히는 발자국은 젖은 모래에 찍히는 발자국보다도 수명이 짧다. 티타냐는 낮 내내 달궈졌던 바위들을 딛고 건너 마침내 온 바다에 어둠이 내려앉았을 땐 바다쪽으로 비죽 튀어나온 너른 바위섬 꼭대기에 올라 어느 방향으로도 남지 않은 발자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신발은 언제 어디다 벗어버리고 왔나. 걸어온 길을 되짚다 관뒀다. 맨발로 돌아가면 좀 어떤가. 페트라를 쥐어짜면 신발쯤이야 새로 내놓겠지. 그것마저 못 하면 칼리아로 돌아갈테다. 밀로가 왜 돌아왔냐고 묻겠지? 그가 신발 한 짝도 구해다 주지 않기에 돌아왔다고 해버려야지. 그럼 아마 벨라는 그 자식 발모가지를 뿐질러버리겠다고 어머니 몰래 제 귓가에 속삭일 것이다. 티타냐는 가족들-심지어 이복 남매인 아이나르까지 포함해서-을 생각하며 벌렁 뒤로 누워버렸다. 두툼하게 쌓인 눈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지만, 적어도 얼어 죽을 걱정이 없어 눈을 감아도 된다는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파도 소리가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문득 차가운 무언가가 종아리를 휘감았다. 티타냐는 소스라쳐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가…? 하고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젖었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검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의 기단을 때리며 제 늘어진 다리를 적시고 사그라들었다. 티타냐는 후다닥 다리를 끌어올려 무릎을 세워 안았다. 이 바위섬, 결코 낮지 않았는데? 해안선은 분명 저 멀리에….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처 들었다. 아뿔싸. 눈에 익은 별이 아니다. 이곳은 칼리아의 산맥이 아니라 서쪽 솔리드아일랜드의 군도였다. 그렇지만 별을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명백했다. 해가 진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났다. 티타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길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열리고 닫힌다 말여.’
    ‘어어, 그래그래. 밀물과 썰물.’
    ‘바로 그거다! 일단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어야.’
    ‘어어, 그래그래. 순식간이라고.’
    ‘그려! 특히 넌 수영도 잘 못 하니께….’
    ‘몇 절까지 할래.’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춤, 공포에 반사적으로 뛰어나가려다가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바닷물을 밟자 다시 페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보기에는 얕어서 뜀박질허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디 아니거든…’

    고립됐다.

    바위 꼭대기의 면적은 차츰 줄어드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티타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역시 바다가 싫었다. 배 위도 아니건만 사방에 물이 보이니 멀미가 도지는 듯했다. 이곳이 설산이었다면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텐데.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 티타냐는 언제나 솔리드아일랜드의 바닷바람을 우습게 여겼다. 그녀의 고향은 칠왕국의 최북단이었으니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실제로 이곳의 바람은 칼리아의 설원을 헤집는 바람에 비할 바가 못 되긴 했다. 허나 그건 옷을 제대로 갖추고 젖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티타냐는 해가 진 뒤의 바닷바람 역시 체온을 앗아갈 수 있음을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엎친 데 덮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만조를 지나 간조 때까지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빗방울은 무시할 수 없을 수준까지 커져 해수면을 난타했다. 감히 물소리라고 일축할 수 없는 소리가 먹먹하게 전신에 스며들었다. 티타냐는 밤바다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태어나 처음 보았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바닷새의 울음소리가 없었구나. 게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별안간 속에서부터 치받는 뭔가를 느꼈다. 눈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물로건 빗물로건 시야가 흐려지자 안 그래도 미약하던 빛들이 죄다 부옇게 번져 명멸했다. 저 멀리에 고스티나야와 브누트리니의 불빛, 그 앞에 항구의 불빛, 그 앞에 등대의 불빛 그리고….

    그리고? 깜빡이는 노란 불빛이 있었다. 티타냐는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고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깝다. 성이나 항구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가까웠다. 그럼, 해안가인가? 티타냐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깜빡, 깜빡, 깜빡.


    저 너머에

    누군가 있다.


    티타냐는 멍하니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불빛이라면 제게도 하나 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등이 달각거렸다. 스베티리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고 다니는 그 등불. 페트라가 혼인식 때 건네준 등불. 잊고 있었지만 제게도 있었다. 밑바닥에 패인 홈에 들어있는 성냥은 다행히 젖지 않았다. 티타냐 역시 등불을 들어 올려 손으로 가렸다 치우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깜빡거리는 불빛으로 서로를 인지하고 난 뒤로 양쪽의 불빛은 조용히 타올랐다. 누군가 저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온 몸을 마구잡이로 두들기던 맥박이 심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고동이 되었다. 티타냐는 하염없이 그 불빛을 바라봤다. 북극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조일까, 바닷물이 지척에까지 차올라 티타냐는 발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끼익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작은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그 위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아버지였어요?”

    둘째가 물었다. 티타냐는 아이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현실로 되돌아왔다. 십육 년이 지났음에도 기억이 휘발되기는 커녕 예상외로 생생했다. 그래서 낮은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다음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조금 민망한 부분이었고, 또 아직은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할 터였다.

    “그래. 또 누가 있겠니.”
    “우와.”

    아이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니까 이건… 섬사람들이라면 어릴 적에 한 번씩은 다 겪는 일인 거야.”

    티타냐가 그렇게 결론지었다.


    “아야- 은제까지 그래 뿔어있을라고?”

    때마침 페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를 먹어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잔뜩 물에 젖은 욕실 안에서 우렁우렁 퍼졌다. 문간에서 길게 그림자가 들이친다 싶더라니, 성큼 다가선 페트라는 다소간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아들들을 내려다봤다.

    “허, 요것들이. 겨우 구해왔더니만 아주 물에 뿔어서 고대로 따개비가 될 심산인가 했는데. 내 색시를 붙들고 있었어야?”

    페트라가 티타냐를 부르는 호칭은 순 제멋대로인 감이 있었다. 그래도 저건 좀 오래된 호칭인데. 티타냐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살짝 어깨를 들썩였다. 그새 순식간에 곁에 온 페트라가 몸을 숙여 한 손은 아내의 어깨를 짚고 다른 손은 물에 넣어 휘저어봤다.

    “다 식었구만. 인제 나오소.”

    아내의 다리에 들러붙은 아들들을 떼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따개비를 떼어내는 듯 우악스러워 보여도 아프지 않게 붙든다는 걸 티타냐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웃음 반, 비명 반 섞어 뭉개진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첨벙첨벙 숨어들어 갔다. 막내까지 내려놓고 나니 페트라가 두 손을 아내에게로 뻗었다. 티타냐 역시 밀고 당길 것 없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체온을 나누던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니 그사이 젖어든 옷이 식어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남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티타냐를 추어올려 고쳐 안고 등허리며 팔뚝이며 몸 여기저길 문질렀다.

    “어이 춥것다. 느덜 엄마는 내가 데려간다잉.”
    “아이들 건져다 말리고 따끈하게 재워주렴.”

    아이들에게 뻐기듯 너스레 떠는 남편에게 안긴 채로 티타냐가 밖에서 졸던 시종과 하녀들에게 지시하자 그들이 여상하게 고개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무신 할 얘기가 그래 많았디야.”

    침실로 돌아가는 내내 페트라는 툴툴거리듯 티타냐의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오늘은 당신이 혼냈잖아.”

    그렇게만 말하고 남편을 지그시 쳐다보는 눈길에 약간의 책망이 담겨있었다.

    “정작 중요한 얘긴 쏙 빼놓고.”

    본인도 겪어봤으면서 그 사실은 은근슬쩍 없는 척 무시하곤 아이들 머리 위에 벼락부터 내린 것을 알고 있었다. 티타냐는 남편이 조금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다를 경애했다. 나이 들어 원숙해진 만큼 더더욱 자신의 기반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헤아렸고 그 위에서 긴장을 늦추는 법이 없었다. 그의 아이들이 배워 평생을 가져야 할 태도였다. 티타냐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대신 내가 체면을 구겼네.”
    “뭘 또 그렇게까지 혀….”

    페트라는 안아 들고 있는 아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 새파란 눈빛 앞에선 도통 여러모로 제정신이기가 어려웠다. 남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자 티타냐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애들은 당신 멋지다고 난리였어.”
    “어어 야그 잘혔어!”

    물론 페트라는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아이들이란 자기가 한 짓을 앞서 누군가 이미 저질렀다는 걸 알아야 빨리 털어낼 수 있다고….”

    티타냐가 그렇게 말하며 남편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늘 내내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걸 안 뒤로 계속 긴장해있었던 몸이었다. 피곤한 게 당연했다. 페트라는 껄껄 웃다가 갑작스레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끝까정 얘기해줬냐.”
    “…?”
    “나가 당신 데리고 돌아가서 같이 목욕… 아, 악, 아아. 알았어야. 그만그만.”

    티타냐는 남편의 어깨 너머로 둘렀던 팔을 움직여 그의 꽁지머리를 붙들고 사정없이 잡아당기다가 놓아주었다.

    @BB0NGDDA 님 커미션




    통과의례: 그때 그 후에 (외전): erudo.tistory.com/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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