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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근과 추가근무와 리넛과 엣킨슨Renisia 2022. 4. 14. 16:14이상한 저택의 리넛
리넛은 뒤집히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성년자에게도 있는 사회적 인생을 사수하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가늘게나마 심호흡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렇게 리넛이 다른 한 손으로 레니샤의 팔을 붙잡고 스스로를 수습하는 동안, 레니샤는 누군가와 빠르게 얘기를 마쳤다.
할 말을 끝낸 레니샤는 자길 잡고 있는 리넛의 손을 떼어 내 다른 사람에게 붙여주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잠깐… 잠깐만요…. 리넛이 속으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있게 된 리넛은 사위를 분간할 수 있게 되자마자 손을 떼며 사과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당황하셨죠…. 그 순간으로 말하자면 레니샤가 서 있던 자리를 보던 이사야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저택을 강렬하게 바라보던 때였다.
음, 그래. 일단 들어갈까…. 리넛은 묘하게 굳은 이사야의 태도가 자신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반만 진실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리넛은 정말로 얌전히 지내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장서 걷고 있는 이사야를 따라갔다.
그런 중에도 리넛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리넛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리넛이 레니샤를 찾은 건 그가 자신을 책임감 있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니샤는 그렇게 해주었다. 리넛은 레니샤를 찾은 자신을 믿었고, 지내며 확신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리넛은 레니샤를 믿었다. 레니샤는 항상 리넛에게 최선일 만한 선택지를 제시했고 그런 선택을 했다. 레니샤가 일주일 쯤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겼어도 사실 리넛은 혼자 지내는 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니샤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이틀쯤이면 몰라도 사흘이 넘도록 집을 비워야 하는 순간이 생기면 일전에 서로 안면을 트게 한 친구를 부르거나 해서 리넛을 챙기게 했다. 리넛은 그런 챙김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아서 따로 의견을 피력해두지 않았었다.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레니샤가 강조하는 안전에 대해서 동의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이상하게 맞물리는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이나' 집을 비우게 생겼는데(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하기는 했다.) 항상 불러서 챙기게 하던 테런스가 업무가 바쁜 주간이라 곤란하다는 의사를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보호자가 둘이면 어지간한 일에 다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레니샤가 결국 그 생각은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금방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레니샤가 리넛에게 짐을 챙기라고 말했다. 리넛이 짐을 챙기는 동안 레니샤는 대략의 사정과 목적지를 아주 간략하게 말했다.
테런스는 이번 주는 어렵다고 해서 부르지 못하게 됐어. 네가 아는 사람이라면 에단 정도일 텐데, 그건 내 생각에 썩 현명한 선택일 것 같진 않거든. 리넛이 몇 달 전쯤의 입원을 떠올리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현명한 선택일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에단은 제법 무언가를 깨닫게 된 모양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안심하기에는…. 안심되는 녀석이 아니었다. 결국 레니샤는 시간에 쫓기듯 반강제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사야 요즘… 휴가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란 모종의 이유와 모종의 이유가 모종의 상황과 합쳐져서 결국 그렇게 된 일이었다. 리넛은 얌전히 이사야의 뒤를 따라갔다. 꼭 관광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저택을 짧게나마 구경하게 된 순간에 이상한 장면이 좀 끼어드는 일이 있기는 했다.
이를테면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나서 그 방향을 보면 커튼 끝자락이 흔들리고 있었다든가,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가도 뚝 끊긴다든가 하는. 앞서가면서 지팡이를 까딱거리는 손 때문에 리넛은 마법이 개입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곧 리넛은 몹시 근사한 방을 안내받았다. 잠깐 해야 할 일이 생겨서 지금은 같이 있어 주지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이사야의 표정이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듯한 발화와는 반대로 무섭도록 굳어 있어서, 리넛은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예의 바른 태도로 괜찮다고 대답해야 했다.
리넛은 급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 한 짐이나마 풀어둘까 싶어 옷장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옷가지를 대강 꺼내 정리한 리넛은 마지막으로 책을 꺼냈다. 그때 리넛은 그 완벽하게 근사한 방에서 딱 한 가지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
책을 펼쳐둘 수 있을만한 책상이 없었다. 소파와 키가 낮은 탁자는 있었지만, 그 위에 책을 펼쳐 놓고 펜을 움직이며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책 몇 권을 들고 뺨을 매만지던 리넛은 하는 수 없이 그 키가 낮은 탁자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원래 이 시간이면 늘 하고 있었던 공부는 오늘 하루는 쉬어가기로 했다. 사리분별 잘하고 침착한 리넛이라도 갑자기 이런 장소에 오게 되면 신기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술렁거렸다. 침대에 누웠을 때 보이는 천장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가정집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층고였다.
리넛은 따로 나가지 않고 얌전히 방 안에 있었다. 아주 조금, 구경하고 싶기는 했지만 돌아다니는 게 좋게 보일 것 같지도 않았다. 무릎 아래를 침대 아래로 늘어뜨리고 낯선 침구에 파묻혀 있던 리넛이 이윽고 첫 번째 하품을 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넛은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흐트러졌을 머리카락도 손 갈퀴로 몇 번 빠르게 쓸어내렸다. 문이 열렸을 때 리넛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허리춤에도 닿기 어려울 작은 키를 가진…. 집요정을 처음 만나게 된 리넛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잃고 말았다.
집요정은 명랑한 어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주인님께서 최선을 다해 모시라고 하셨어요! 리넛은 그만 그 집요정이 부담스러워지고 말았다.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으며 친절하게도 여러 예시를 들어주는 집요정 덕분에 리넛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간식을 먹겠느냐 묻는 말에 리넛은 아직 자신이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허기가 밀려왔다.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하던 리넛은 결국 집요정에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부탁했다. 레니샤가 퇴근하면 같이 먹을 셈으로 식사를 미루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바람에 아직까지 먹은 것이 없었다. 집요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졸음에 잠식되던 리넛은 벌써 잠이 들면 수면 패턴이 망가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되새기고 다시 침대 위로 늘어지는 대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놀만한 걸 챙겨오지 않은 탓에 딱히 할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펼쳐서 설렁설렁 넘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손님은 그때 찾아왔다.
탁자 위에 놓인 등을 가까이 끌어다 둔 채로 책을 팔락거리던 리넛은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리넛이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으며 문밖을 향해 대답했다. 뜻밖에도 이번 손님은 이사야였다. 리넛이 의아함과 놀람이 조금씩 섞인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리넛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것들을 해결한 이사야는 머무르는 동안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기 위해 온 참이었다. 가까이 끌어당겨진 등과 펼쳐진 책을 본 이사야는 잠시 침묵했다. 본의 아니게 손님을 대뜸 방에 던져두고 사라진 셈이었다. 음…….
리넛은 다시 보게 된 집주인에게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몇 가지 편의를 얻을 수 있었다. 벽에 쳐진 커튼은 걷으면 안 되고, 밤늦게 방 밖을 나설 때에는 집요정을 불러야 하고, 지하실에는 가면 안 되고…. 커튼에 대한 부분은 의아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손님으로서 당연한 예의에 관한 것이었다. 리넛은 어렵지 않게 주의사항을 납득하고 기억했다. 이사야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 법한 곳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리넛은 그 정보를 반갑게 들었다.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이사야가 돌아가려던 차에 집요정이 빵을 들고 등장했다. 이사야가 집요정이 들고 온 것을 보고 있었다. 리넛은 이사야의 눈치를 조금 보고 말았다. 한편 이사야는 결국 다소 미안한 마음을 갖고 말았다….
리넛은 자신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집주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 리넛은 또 갈피를 잃었다. 어…….
뒤늦게나마 식사 여부를 물으며 식사를 하겠냐고 묻는 이사야와 함께 식사를 하기에는 리넛은 그런 면에서 담대한 성품은 아니었다. 학교를 뛰쳐나온 담대함은 그 순간에 한 톨도 없었다. 두어 번 사양하고 의외로 담백하게 수용한 이사야가 돌아갔다. 리넛이 그제야 집어 든 빵은 맛이 좋았다….
한편 외근 나간 레니샤는이쯤에서 우리는 레니샤의 상황을 살펴줄 필요가 있다. 테런스가 혀를 차더라도, 이사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더라도, 레니샤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정말로. 리넛이 엣킨슨가의 대저택에서 머물며 이따금 살풍경한 장소를 발견하는 동안 레니샤는 정말로 생사의 고비…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고비를 넘고 있었으니까. 레니샤는 연달아 순간이동 마법을 실행하며 이곳에 오기 전 그의 상사 마커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어린애라고?” “네, 뭐. 그렇게 됐어요.” “아쉽네.” “뭐가요.” “이제 전처럼 못 굴릴 테니까.” “……?” “네가 혼자라서 다행이었던 작전들.” 레니샤는 의아한 얼굴로 상사이자 최고의 파트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정색했다. 이 쓰레기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적당한 위탁처, 은신처, 도피처를 여럿 구해놔야 할 거다. 걔는 네 약점이 될 거야.” “결혼 못하신 이유를 저한테까지 어필하실 필욘 없어요.” “나는 네가 혼자라서 좋아했었다고.” “쓰레기 같은 말 그만하시고요.”
레니샤는 대단히 기분이 잡친 채로 마커의 입을 (물리적으로) 막고 라이너리를 불러다 구박하며 그날의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커의 말이 옳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만큼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 역시…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사회가 머글들의 사회와 접점이 커지고 있는 만큼 한때 어둠의 마법이나 조금 깨작거리고 말던 치들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어지간히 세를 불렸다 싶으면 어김없이 양쪽 사회에 발을 걸치고 유착한 채로 교묘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레니샤는 마법부와 머글들의 관공서 사이를 오가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는 레니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러국 자체의 업무 처리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서, 레니샤는 테런스를 안배해두는 것으로 만족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물론 그는 자기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그로서도 불가항력인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너도… 야근해? 야 나두 직장인이야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누고 레니샤는 빠르게 선택지를 소거했다. 자, 누가 남지?
바로 옆집에 사는 밀라니 아주머니? 머글이시다. 만에 하나 유사시를 대비할 수 없다. 게다가 아주머니의 아들이 걸린다. 녀석은 이미 리넛을 보고 마녀 아니냐고 물어본 전적이 있었다.
나이 덕분에 어린이들의 상상력이란~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통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녀석이 무사히 성장하고 어린 날의 믿을 수 없는 발언을 잊어버릴 때까지 새로운 장작을 넣어주는 건 금물이다.
이렌?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 그 애를 끌어들이는 몹쓸 짓을 저질러선 안 됐다. 로랑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물론 이렌이라면 기꺼이 망설임 없이 리넛을 맡아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뭐,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렌과 로랑 둘 다 출근하는 생활패턴을 갖고 있으니 사실상 리넛이 그들 부부에게 신세를 진다한들 그리 유의미한 선택지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에단. 레니샤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는데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더라도 그렇지. 그는 리넛과의 첫 만남을 병원에서 치른 전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보내준 파이를 리넛이 집어먹은 까닭이긴 했지만,
에단에게 십 수 년간(이제 근 이십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파이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냈음에도 전혀 깨달음과 발전이 없는 친구는 곧 친구 자격을 박탈당할 예정이었다. 불을 지른다고는 해놨는데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방화범이 되는 것보단 그냥 친구를 버리는 게 더 나아 보였다.
다음은…. 아. 왜 내가 걜 잊고 있었지? 이사야가 있었다. 그것도 휴가를 승인받은 이사야가! 멀린 맙소사 감사합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 휴가는 꽤 길게 썼다고 했다. 엣킨슨 저에 가서 지낼 거라고. 아니? 타운하우스가 아니라 엣킨슨 저택이다! 고민하던 여러 가지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레니샤는 반쯤 눈이 돌아가서 리넛을 채비시키고 대번에 순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어차피 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이 이상 지체되면 마커를 따라잡지 못하고 라이너리와 후발대로 가야 할지도 몰라 그러면 속이 터져 죽어서 다시는 리넛을 볼 수 없게 되겠지...
이쯤이면 충분한 변명이 되겠지. 레니샤로서는 정말 최선의 선택이 이거였다. 물론 이사야의 집안 사정… 알지만. 레니샤는 자신의 후배가 그 정도 난관은 헤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다…. 애가 좀 웃자라긴 했는데… 서른 먹었으면 이런 일도 겪어봐야 하는 거라고… 아, 빌어먹을, 잠깐,
“라이너리, 거긴 안 돼!” 레니샤는 과거를 되짚어 나가던 생각을 단칼에 자르고 비명을 지르며 라이너리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저거 무너지면 전력 공사랑 싸워야 한다고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안 했는데요! 대드는 녀석을 걷어차고 사태를 살피던 레니샤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리넛과 이사야가 보낸 한 달이사야는 차분하게 리넛이 머무는 방문을 닫았다. 정정하겠다. 차분하게 닫지는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차분했다만…
정신없는 와중 한숨 돌리며, 선배 진짜 미-친거아냐??? 이 저택에 15살짜리를 들이긴 뭘 들여-!!!!!! 다른 가족이라도 있었으면어쩔뻔했냐고저초상화들가려놓는것도한계가있다고나는애를못다룬다고진짜미쳤나봐. 라고 생각 중이었다.
거절하고 싶었고, 사실 거절해야 했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애는 이미 저택의 빈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 상황에서 돌려보낼 수도 없잖아… 이사야는 미간을 짧게 찌푸렸다가 집요정을 불러 아이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네가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한번 더 말해두었다.
리넛은 집요정도 다소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으므로 이 자리에 있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겠지만, 그걸 이사야가 알 도리는 없었으므로.
이사야는 식사를 거르고 제 방으로 이동했다. 문득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능휴가를혼자서보내려고했는데왜일이이렇게됐지….. 풀썩… 누워 잠들었다. 자는 동안 조금 앓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사야는 물론이고 리넛도 리넛대로 심란한 밤이었다. 아마 레니샤도 심란할것이다. 아니면 바빠서 생각할 틈도 없거나. 어느 쪽이건 행복하진 않겠지.
아침에 일어나자 놀랍게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우선 그는 동생인 다프넨에게 편지를 보냈다. 잘 돌려서 썼으나 결국 어린애가 머물고 있으니 제 동생이자 그의 형인 와이어트가 본가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관리 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제 집요정을 불렀다. 집요정은 이 한적한 저택에 의외의 손님이 온것이 반가운지 평소보다 묘하게 들뜬 낯이었다.
이사야는 집요정에게 리넛의 상태를 전달받았다. 리넛은 성실하게도 이른시간에 일어나, 벌써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음, 잘 지내는군. 좋은 일이야. … … …그래서 그냥 저대로 두면 되는건가? 그는 방금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짐을 느꼈다.
집요정이 가져온 차를 식사 대신으로 마시며 고뇌에 빠져있자 집요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주인니임.. 점심 식사는 손님이랑 같이 하실거죠? -… 점심식사.
아침은 그렇다 쳐도 점심은 같이. … … 꼭 먹어야하나? 직장 상사나 대하기 어려운 높으신 분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긴장은 안한 것 같았다. (사실 그땐 그닥 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밥 같은건 굶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자… 먹으라고 하면.. … 역시 좀 그렇겠지?
집요정은 또 다시 고뇌에 빠진 제 주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야 이사야는 작은 힘없는 목소리 답했다. -… 그래야지… … … … .
집요정은 그 말에 해바라기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음식들로 준비할게요! 오! 물론 손님분의 취향도 중요하겠죠. 어쩌구저쩌구 재잘재잘. 집요정은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사야는 레니샤에게 이 일을 대가로 무엇을 받아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그냥 복수 계획을 세우는 걸지도 몰랐다.
이사야가 이 시간만은 제발 오지 않기를 바라든 말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집요정이 간만에 솜씨를 잔뜩 부린 음식들은 먹음직스러운 자태였으나, 이사야는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았다.
리넛에게도 뭐 당연히 행복한 점심시간은 아니었다. 점심은 식당에서 먹어야한다는 집요정의 말에 내려와 보니, 지금 자신이 저택에 머무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의 어른이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차라리 혼자 먹게 해주지… 음식은 맛있어 보였다…. '와삭' …맛있당…
가볍게 인사만 나눈 이후로 식탁위에는 음식을 먹는 소리만 맴돌았다. 집요정은 신이 나서 음식을 계속 날랐다. 사람 수에 비해 조금 양이 과했다. 심지어 집주인은 물만 들이키고 거의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흘끔. 그래도 뭔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리넛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이사야씨? -쿨럭. 리넛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물을 마시던 이사야는 사레가 들었다.
이사야는 냅킨으로 빠르게 수습했다. 그 순간 리넛은 묘하게 긴장이 풀렸다. 시선을 마주하자 매서운 눈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리넛은 근거는 없지만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 지금… 좀 긴장한 거 같은데?
-…오늘 날씨가 좋네요. 리넛은 무난하게 날씨 이야기를 했다. 적절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요 몇주는 계속 날이 흐렸우나, 오늘에서야 해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잠시간 대답이 없었고 다만 표정이 좀 더 사나워졌다. 리넛은 그 표정때문에 다시 다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저쪽도 긴장한 거 같은 건 차, 착각이었을까. 리넛은 잽싸게 시선을 음식으로 다시 돌려서 스프를 호롭 마셨다. 옥수수 맛이 났다. 그 맛에 집중하고 있자 다시 이사야 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다소 무뚝뚝한 어조였으나 리넛은 대답이 돌아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레니샤가 돌아오기까지 몇일은 걸릴테고, 그 동안은 이 좀 긴장한거 같기도 하고 무서운거 같기도한 헛갈리는 집주인과 지내야했다. 굳이 친해질 필요는 없더라도 적당히 눈인사는 할 수 있는 관계로 지내는 것이 좋았다.
리넛은 이어서 아무거나 말했다. 정말 아무거나 말한건 아니고, 적당히 식사시간에 할만한이야기들을 했다. 잠자리는 좋았다, 집요정이 친절하더라, 신세지게 된 동안 잘 부탁한다, 식사 양은 원래 적으신거냐.. 등등등…
이사야도 적당히 대답을 했다. 아까보다는 풍부한 대답으로. 여전히 리넛이 더 많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넛 덕에 얼어붙은 식탁이 녹아들었고, 집요정은 그 광경을 어쩐지?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사야는 리넛의 노력이 고맙고 기껍기는 했으나… 엄청 부끄러워졌다.
지금.. 나는 가만히 있고
애가? 손님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거냐?
아 ㅋㅋ 미쳤나봐.
이사야가 반성하는 동안 식사시간이 끝났다. 반대로 식사를 마친 리넛은 조금 뿌듯해졌다.
이 저택에 지내는 시간이 그래도 영 얼음판이 되지는 않겠구나. 해냈어!
그날은 더 이렇다할 사건은 없었다. 리넛은 이후 공부를 위해 저택의 도서관에 가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 있는 책들도, 레니샤가 준비해주는 책들도 모두 훌륭했지만, 저택의 도서관은 아무래도 대를 이어가며 모은 책들이다보니 양이 더 방대했으며 구하기 힘든 종류도 많았다. 만족스러웠다는 이야기다.
이사야는 휴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보니 조금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저택에 애가 있어서 더 그렇고. 그냥 이시간에 일하는게 더 여러모로 이득일거 같은 묘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다프넨에게 답장이 왔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나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며 이사야는 편지를 뜯었다.
다프넨의 평소 필체보다 조금 날려쓴 듯한 편지였다. 좀 급하게 썼나보군. 내용은 별게 없었다. 와이어트에게 잘 전달하겠다는 말이 주 내용이었고, 마지막에 와서는 이사야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긴 다프넨이야 말로 이 상황이 이사야에게 너무 힘든 일중 하나라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걱정하는 글이 계속 이어지다가, 추신에는 원한다면 자신이 찾아가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쓰여있었다.
이사야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지금 상황이 너무 … … … 힘든것도 맞았다. 너무… 피로했다. 이사야는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 고민하던 이사야는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나랑 있으면 애도 불편하겠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할 것이다. 이사야는 금세 답장을 써서 다시 편지를 묶어 보냈다. 레이몬드는 다소 귀찮은 기색이엇으나 군말없이 날아올랐다.
깜깜한 새벽. 리넛은 눈을 떴다. 목이 끔찍하게 말랐다. 더듬더듬 주위를 더듬으며 일어났다. 비몽사몽한 와중에 늦은 시간에 원하는 게 있으면 집요정을 부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집요정을 도대체 어떻게 부르란 말인가? 낮 시간에는 틈이 날때마다 집요정이 나타나 필요하신 건 없으시냐고 쫑알거렸기 때문에 스스로 부를 틈도 없었다.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되나? 어떤… 마법적 그런 게 있나?
하지만 이 새벽에 자고있을 것이 분명한 집요정을 깨우는 것도 리넛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고작해야 물 한잔이면 끝날 일이었다…. 리넛은 아까 보았던 식당과, 이어진 부엌의 위치를 떠올리며 지팡이를 쥐었다. 어두운 곳을 지날 땐 불을 켜야지. -루모스
당연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리넛은 부엌 의자에 쪼그려 앉아 물을 한잔 마셨다. 홀짝거리던 와중에 어둠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리넛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금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 들었겠지. 어서 방으로 돌아가야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쪽이란다.
리넛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놀랐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 시간에 큰 소리를 냈으면 모두를 깨우고 말았을 것이다. -겁도 많구나.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는 깔깔 웃었다. 리넛은 지팡이를 손에서 놓지 않고 신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리넛은 부엌과 이어지는 곳에 있는 작은 초상화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이사야가 리넛이 이곳을 지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미처 가리지 못한 초상화였다. 색이 바랜듯한 보라색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노년의 여성이 액자 안에서 보란듯이 웃고 있었다.
- 당신이로군요. 날 놀래킨 게. -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래 맞아. 리넛은 다소 뾰로통해졌지만 어른스럽게도 그것을 티내진 않았다. - 이 곳에 초상화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 이 곳에는 사방에 초상화가 있어. 오래된 마법사의 저택이란 그런 법이지.
초상화 속 여인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말하며 계속해서 웃었다. - 저는 본 적 없는데요. - 그건 지금 저택의 주인이 다 가려놓아서 그렇단다. 리넛은 그제야 벽에 있는 커튼은 걷어내지 말라는 요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 가려놨다고요? 왜요? - 이제 막 자라나는 새 시대의 마녀가 백년전에 죽은 노친네들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리넛은 두루뭉술한 대답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쩐지 더 알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은 물을 홀짝이는 리넛에게서 그녀는 눈을 때지 않았다. 흝어본다는 말이 적절할지도 몰랐다. 리넛은 기분이 묘해졌다.
- 음, 그래서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 내가 불러놓고 처다보기만 했구나? 그저 나는 이 저택의 손님이 대체 어떤 마녀길래 집 주인이 그렇게 온 신경을 다 쓰나 궁금했을 뿐이야. 이렇게 겁이 많은 손님일 줄은 몰랐지만. - 별로 절 신경 쓰는 것 같진 않던데요.
왜인지 식사할 때 잠깐 긴장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후의 대화는 무난하긴 했어도 별로 환영받는 느낌은 아니었기에, 리넛은 아마 그것이 자신의 착각 비슷한 것이리라고 생각 했다.
- 그래? 초상화들을 급하게 다 가려놓고는 집요정에게 몇 번이고 신경쓰라고 이르기에 신경쓰는 줄 알았더니만. - 그랬다고요? 그걸 다 어떻게 아시죠? - 이 저택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
커튼을 쳐놔도 틈새로 보는 것이 초상화니까. 그 말에 리넛은 제 방에 자신을 감시하는 초상화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까지 지낸 바로는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리넛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 초상화 속 마녀는 어쩐지 그리운 눈빛이 되었다.
- 이곳에 어린 마법사가 있는 광경은 오랜만이구나. - 이사야씨 혼자 사시는 것 같으니 당연하겠죠. - 그렇지. 그리고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부엌 쪽으론 잘 오지 않아서 말이야. - 그래요? - 아가씨는 집요정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지? - 음, 네.
거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옛날에도 특이하게 새벽에 부엌에 내려오는 어린 마법사가 하나 있었지. - 이곳에 나고 자란 마법사여도 집요정이 번다한 마법사가 있는 모양이군요. - 그런 걸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 그래서 그 마법사가 누구인데요? - 지금 집주인! 와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곤 했어. 이사야씨가? 야식을 즐기는 타입 일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리넛은 조금 이상한 오해를 했다.
- 요령이 없으니까, 걔는 좀 속 터지는 타입이지. - 그런가요… -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무서워 할 필요는 없어! 사실 아주 겁쟁이거든. 리넛은 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자다 나와서 졸리기도 했고.
리넛이 초상화가 떠드는 것을 들으며 졸고 있자 초상화는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 자다 나온 애를 너무 오래 붙잡아 놨군. 새로운 얼굴을 너무 오래 봐서 그래. 노인네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주련. 그렇게 말하고 초상화는 집요정을 불렀다.
집요정은 꾸벅꾸벅 조는 리넛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방으로 천천히 안내했다. 리넛은 곧바로 잠들었다. 날이 밝아 일어났을 떄엔 새벽에 겪은 일이 물결마냥 희미해져서 마치 그런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리넛은 눈을 비비며 혹시 방안에 초상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방안을 살폈다.
와중에 이사야는 밤새 리넛이 겪었던 일은 꿈에도 모르고, 일어나자마자 다프넨에게 답장을 받았다. 분가에 사람이 올 때까지 노아를 잠시 살펴봐야하니 당장은 힘들고 내일 점심이 지나고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편지는 어제 썼을테니 다프넨은 바로 오늘 오후에 올 것이다.
이사야는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노아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이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부 다프넨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무한한 감사도.
어제와 같이 무난한 점심시간(여전히 이사야는 거의 먹지 않았지만)이 지나고 다프넨은 플루 가루를 타고 나타났다. -형. -왔구나. 좀 급하게 왔는지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말이다. 이사야는 환영했다. 마음 깊이.
당연한 수순으로 이사야는 리넛에게 다프넨을 소개해주었다. 점심식사때 미리 말해두었기 때문에 리넛은 놀라지 않고 예의바르게 인사할 수 있었다. 리넛의 입장에서 볼때 다프넨은 이사야와 다르게 매우 따스하고 대하기 편한 어른이었다.
그는 자세를 낮추는 것에서 부터 이사야와는 달랐다. 방긋 웃으며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말하기도 전에 자신이 필요하거나 불편했던 점을 지적해 주었다.
리넛은 그가 어떤 이유 때문에 이쪽에 잠시 머물게 된 것인지는 전혀 몰랐으나, 그렇게 되어서 무척이나 다행이며,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이사야는 리넛이 상대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리넛은 여전히 그의 책임에 가까웠으며 신경 쓸 거리가 이것 저것 있었으나… 아무튼 간에 리넛이 훨씬 감정적으로 편해졌으며, 자신이 아닌 다른 기댈만한 어른이 있다는 점에 무우우척이나 깊은 안도를 느꼈다.
다프넨은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라는 말을 끝으로 리넛을 방으로 보냈다. 그러곤 자신의 형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활짝 펴져 있었다. 처음 본가에 돌아왔을 때 얼굴을 떠올려보면 그 대비가 정말 극명했다.
이런 것이 이사야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다프넨은 분명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왔지만, 이 정도 일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적인 일에 동요하지 않고 대부분의 일은 혼자서 그럭저럭 해결하는 자신의 형이 그렇게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을 한 것은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그 누가 이사야 엣킨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인가… 그의 형의 단호하고 냉정한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다프넨은 어쩐지 리넛의 보호자라고 하는 '레니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았다.
잠시간 빤히 이사야의 얼굴을 보고 있자, 이사야는 제 이마를 짚으며 털썩 앉았다. 그리고 긴 숨을 뱉어내듯 말했다. -고맙다……………………………. -………………. 다프넨은 진짜 기분이 이상했다. 형… 그렇게 힘들었어? 알기야 알았지만 막상 보니까 진짜 이상하다….
원래 이사야는 제 동생들에게 더욱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라 다프넨에게는 더 낯설었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싶다가도 어째 기껍기도 했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뭐 별거라고. -별거지. -비행기 태우지 마. -진심이야. 네가 없었으면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 났을 거다.
그거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서 다프넨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내가 이런거라도 해야지. -…. -편히 쉬어, 몇년만에 휴가라며. -그래. 다프넨은 진심을 담아 말했으나, 이사야는 사실 휴가를 역시 괜히 냈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 날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리넛과 다프넨은 적당히 친분을 쌓았다. 이사야는… 그냥 이사야였다.
리넛은 레니샤가 따로 공부를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바를 성실히 다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리넛이 배워야 하는 양은 다른 어린 마법사들이나 머글들에 비해 다소 많은 감이 있었다.
보호자인 레니샤의 철학, 혹은 욕심에 따라 머글들의 학문과 마법사들의 마법을 동시에 공부해야했기 때문이다. 리넛은 스스로가 적당히 공부를 즐거워하는 타입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였으면 뭐, 땡땡이라도 쳤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스스로도 우스운지 리넛은 작게 키득거렸다.
다만 역시 레니샤나 공부를 도와주는 선생님이 없으니 공부 효율이 떨어짐을 스스로도 느꼈다. 적당히 친분을 쌓은 다프넨에게 도움을 요청해보긴 했지만, 흔쾌히 동의와는 다르게 질문을 들으면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프넨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졸업한지 얼마나 지났는데-! 그는 요새 다른일을 한다기보단, 집안의 잡일을 다방면적으로 처리하고 있었으므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간단한 마법을 제외하면 거의 마법과는 담을 쌓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어진 재능 또한 달랐다. 물론 다프넨도 래번클로이긴 했지만, 래번클로라고 모두가 마법이나 지식적인 재능이 충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도 만족스러운 성적이 나오지 않는 학생이었다.
좋은 머리를 타고난 가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런 이질적인 기질을 타고나 다소 억울함을 느낄때도 있었으나, 이번 리넛건과 같이 집안에 큰 일이 터질때마다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다른 것이구나, 스스로 납득하곤 했다. 정말 다프넨이 없었다면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거다.‘
하지만 다프넨의 사정은 리넛의 알바가 아니었다. 왜 어른인데 질문의 답을 모르는지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리넛은 어쩔 수 없이 일단 질문할 내용을 정리해 놓고 레니샤가 돌아올때를 기다리기로 했다가, 잘 관리된 이 저택의 서재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리넛이 서재에서 시간을 점점 더 오래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궁금증은 해소 되었으며 어떤건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서재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점점 목적이 궁금증 해소보다는 그냥 흥미로운 책들을 뽑아 읽는 시간으로 변질 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그것또한 공부이니.
리넛은 두 코너를 빙글빙글 돌았다. 시계방향으로 2번, 반시계 방향으로 1번 다시 시계방향으로 한번… …
엣킨슨가의 장서들이 아무리 잘 관리되어있다고 한들 결국은 저택에 딸린 서재일 뿐이므로, 리넛은 서재의 책을 전부 읽지는 못할지언정, 서재의 구조만은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곳에 저런식으로 이어지는 책장은 없음을 확실히 알았다. 안그래도 인테리어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인 엣킨슨가 저택에서 저 근처는 기분탓인지 더더욱 어두워 보였다.
리넛이 한가지 놓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곳이 마법사의 저택이라는 것 뿐이었다. 리넛은 자신을 의심하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얼핏 흥미롭고 어쩌면 자극적인…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제목의 책들이 꽃혀있었다.
리넛은 15살이고, 지식을 쌓는 것을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었으며, 처음보는 책을 찾아 읽는 것도 즐겼다. 그러니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저 책들은 자신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
-멈춰. 리넛이 그곳에 한발 발을 딛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리넛의 귓가에 속삭이던 소리들은 단숨에 사라졌다.
방금 뭐였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넛은 자신의 앞을 막은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이사야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리넛에게는 책망의 한숨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나타났던 공간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아, 마법처럼은 아니지, 그냥 마법이었다.
리넛은 변명해야할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하다. 리넛이 잠시 우물쭈물 하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이사야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 두는 것을 잊었다. 이 곳엔 숨겨진 공간이 많으니, 못 보던 곳을 발견하면 가지 않는 것이 좋아. 아니면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가거나.
이사야는 리넛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경직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서 리넛에게 익숙해진 것도 있었고, 다프넨덕에 느끼는 안정감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로는 이사야도 정신이 없어서였다.
애를 다루기 힘들고 어쩌고 부담되고 할 때가 아니었다. 위험한 쪽으로 애가 갈뻔했잖아! 이런 젠장… … 리넛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레니샤 선배를 볼 낯이 없었다.
리넛은 그저 당혹스러웠다. 가까스로 자신이 할 말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음. 네. 감사합니다. 마치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처럼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빙글빙글 도는 자신의 사고를 정리했다. 아까의 광경은 필히 저택에 숨겨놓은 마법사들의 책이겠지.
그 사실이 리넛의 마음속 모험심을 불태우는 반면, 그 속삭임과 이사야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위험한 책들임이 틀림없었으므로 동시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사야가 왜 여기에 있지? 라는 근본적인 길문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물론 그의 저택이니 그가 가지 못할곳은 없겠지만, 리넛이 머무는 동안 이사야가 이곳에 들르는 광경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은 정말 이상했다.
그렇게 때문에 리넛도 늘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머물렀던 것이고.
은밀하게 리넛은 모를 진실을 밝혀보자면, 사실 이사야는 매일 이곳에 왔다가 갔다. 게으르게 늘어질줄 모르고, 유흥을 위한 취미도 없이 평생 살아온 마법사가 억지로 쥐어진 휴가에 뭐, 해봤자 뭘 하겠는가? 그냥 앉아서 책이나 읽는 거지.
단지 리넛이 있음을 눈치체고는 늘 소리소문 없이 책만 챙겨서 제 방으로 달아났을 뿐이다. 그가 마법사인것이 천만다행이렸다. 그러니 오늘 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사야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리넛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침착한 감상으로 똑바로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운 듯 했던 리넛의 표정도 서서히 침착해지고 있었다. 이사야는 자연스럽게 리넛이 책상에 쌓아놓은 책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장 위에 놓인 책이 유독 낡아보였다. <50가지 약초로 만드는 1000가지 마법약 사전> 이사야는 가볍게 책을 들어올렸다. -구판이네. -네? 이사야는 대답을 하는 대신 신판을 꺼내다가 리넛에게 가져다줬다. 신판 이래봐야 50년전 책이지만. 뭐…
리넛은 책을 받았다. 잠시 이사야를 바라봤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어른.
- 그, 리팅구스 마법약 공식에 관한 책도 있나요? - 3번째 책장 아랫쪽에 있을거야. - 보우트 - 엘그넌 법칙도 잘 모르겠어서요. - 마지막 책장 오른쪽 위에 꽂혀있는 <법칙기록>이 도움이 되지. - 변신술 기초를 읽는데 애니마구스 관련이 이해가 안가서요.. - 아, 그건…
리넛은 한참 질문하다가 급기야 자신의 노트까지 꺼내서 보여줘가며 이어 물었다. 몇날동안 막혀있던 답답함이 불편함을 압도했다. 한번 말이 터지니 멈추지 않고 나왔다. 게다가 이사야는 리넛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성실히 답해주었다. 레니샤가 주는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팁들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선의라기보다는, 그냥 말 할 수 있으니 말한다는 태도로.
마침 위기를 마주했을 때 이사야에게 내려앉은 침착이 그 기세를 유지했다. 리넛의 질문에 답하면서 어떤 익숙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향수라고 불러도 좋았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후배를 도와주거나, 동생들에게 노트를 보여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레니샤가 바라는 리넛 돌봐주기도 아마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사야가 그냥 지래 겁먹었을 뿐, 물론 더 큰 책임이 따르기야 하지만… 식사도 재대로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레니샤가 종종 생각하듯, 이사야의 '웃자란' 부분이란 이런 구석이겠지. 레니샤와 몇몇 학창시절의 동창들을 제외하면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리넛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아 둬도 괜찮나 싶어서 시계를 확인했더니 어느새 한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 말은 곧 저녁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이사야는 리넛이 가져갈 듯한 책들을 몇권 남겨두고는 지팡이를 휘둘러 제 자리에 남은 책을 꽂아넣었다.
이사야와 리넛이 저녁식사를 위해 집요정이 부르기 전에 자연스럽게 헤어지려는 찰나, 리넛은 이사야를 보고 다소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일도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사야는 방으로 돌아와 깊이 후회했다. 그 물음에 '그래' 라고 답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소 나아지기는 했으나, 특히 오늘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여전히 이사야에게 리넛은 불편한 존재였다. 리넛이 스스로를 현재 어쩔 수 없는 불청객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도 이렇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오늘처럼 내일도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여튼 긴장된다고 젠장할…
이사야가 후회을 하든지 말든지, 내일은 빠르게 찾아왔다.
다프넨은 점심식사 시간 이후로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늘 그렇듯 집요정의 요리솜씨가 완벽했던 덕도 있지만, 이사야와 리넛의 사이가 전만큼 불편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프넨의 촉은 이런 쪽으론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이사야의 생존전략이 노력과 과로였다면, 다프넨은 잘 벼른 눈치였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은 우연인가 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조금은 친해진 모양이었다. 이사야와 리넛이 만날때 마다 다소 불행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신경쓰였던 다프넨은 아주 행복해졌다. 어쩌면 더 친해질 수도 있어!
아마 이사야는 무리겠지만 리넛은 제 집처럼 편하게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어른에 집주인이지만, 리넛은 아직 아이이고 손님이었으므로 다프넨이 조금더 신경쓰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프넨은 오후에 집요정이 전달해준 소식을 듣고는 더욱 행복해졌다.
둘이 함께 서제에 있다는 것이다! 오 멀린 세상에 맙소사. 다프넨은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오히려 이후에 더 사이가 안좋아지면 어쩌지… 한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자 해어나오기 힘들었던 그는 집요정에게 따듯한 초코릿을 부탁했다. 이것은 다프넨의 고질병이었다.
다프넨은 핫초코를 입안 가득 삼키며 홀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형. 잘 됐으면 좋겠다.
잘되긴 뭐가 잘 돼… 이사야는 리넛을 위한 책을 골라 가져오며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리넛은 어제와는 또 다른 태도의 이사야를 보고는 혼란스러웠다. 식사시간에는 평소와 같이 서로 아무말도 안했지만, -다프넨 덕에 냉랭한 시간은 아니었다.- 이사야를 볼때 이전처럼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냉랭한 표정에 무뚝뚝한 답. 어쩐지 엉성한 대답.. 하지만 그렇다고 항의할 정도로 무성의하지는 않은. 오늘도 공부를 봐달라고 하는 건 좀 그랬나, … 리넛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서러워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찰나, 마침 이사야의 태도가 점점 괜찮아 지기 시작했다. 막상 해보니 또 어라? 해볼만해? 싶었던 이사야가 또 평소의 텐션을 찾은 것이다. 어제는 물어보는데 급급했던 리넛은 오늘은 이사야의 태도를 눈과 귀로 새길 수 있었다. 이렇게도 말하는 사람이구나.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 지나고, 리넛은 자연스럽게 내일의 약속을 잡았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음 일과가 되고, 또 다음날이 되고… 어느새 그 시간은 일상이 되었다. 마치 늘 그래왔던 양 자연스럽게.
그 여파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물들었으며, 다프넨의 행복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식사 시간에 둘이 간단한 대화라도 나누면 다프넨은 웃음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이사야는-사실 리넛도- 제법 부담스러웠다.
이사야와 단 둘이 남으면 은근슬쩍 '요새 둘이 사이가 괜찮아 보이던데.' 하고 이사야를 떠 보기도 했다. 다프넨은 이사야의 변화가 제법 기꺼웠다.사실 그의 변화라기에는 리넛에게 한정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으니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기야 하지만, 아무튼 기꺼운 것은 기꺼운 것이었다. 어쩌면 이 사소한 일이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뭐,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그리고 동시에 평생 보호받는 입장에 있었던 다프넨이 형의 변화 같은 것에 몽글몽글한 감상에 젖어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늘 똑같을거 같지만, 이사야도 변하겠지. 사람이니까. 시간은 늘 우리에게 변화를 선물하고…
그것이 반드시 진보란 법은 없지만, 다프넨은 자신의 삶을 더듬어 봤을때 늘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좋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한 사고는 다프넨에게 익숙한 생각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낙관은 필요하니까…
그런 다프넨의 바람에 응답하기라도 하는 듯, 둘의 이제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불편한 상대에서 적당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리넛은 자신의 노트를 확인하는 이사야를 흘끔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서워 보이는 외관, 무표정한 얼굴. 호의인지 무관심인지 알쏭달쏭한 덤덤한 태도, 그러나 자신이 요청한 부탁은 거절 하지 않는 조금 어려운 어른.
책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서재에는 언제나 빛이 잘 들지 않았으나, 하루에 한번 정도는 작게 난 창문틈새로 볕이 짧게 책상에 내려앉았다. 우연히도 리넛이 이사야를 흘끔거리는 찰나가 그때였고, 볕은 이사야를 그림자지게 하고는 리넛에게 정면으로 내리쬐었다.
리넛은 눈이 부셔 손으로 눈가의 볕을 가렸다. 오늘은 간만에 맑은 날이었다. 이 어두운 저택에도 환한 빛이 잠시 들 만큼. 오후의 햇살은 따끈했다. 그리고 아마 그 빛이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저는… 이사야씨(Mr.Atkinson)가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냥 이사야라고 불러. 이사야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노트 몇장을 넘기다가 이내 덮었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이사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싫어한 적 없어. 리넛은 이사야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그냥 좀 불편했을 뿐이지. -그게 싫어한 거랑 뭐가 다른데요? - … ….
짧은 정적이 흘렀다. -네 문제가 아니었어. 내 문제지. -그게 무슨 의미죠? -어린애를 돌봐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전 어린애가 아닌데요. 리넛의 표정은 한층 더 불편해졌다. 이사야는 굳이 리넛의 답을 말로 부정하진 않았다.
-레니샤가 널 여기 맡긴건 내게 책임을 맡긴거나 다름 없지. 리넛도 그걸 말로 부정하지 않았다. 얌전히 앉아 이사야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대화를 나누는사이 이사야을 그림자지게했던 볕은 어느새 기울어 이사야를 빗겨 지나가고 있었다. 이사야에게 익숙한 그림자였다.
말을 고르던 이사야는 문득 리넛에게는 솔직히 말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속이려던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내밀한 감정은 말하기 어려운 것이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리넛은, 눈앞에 있는 사람은, 결국 제가 책임을 못다해 무례를 겪게 된 아이였다.
정확한 이유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이사야는 생각했다. 어설프게 넘기는것은 되려 그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고.
-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뜬금없이? 리넛은 다소 의아했으나 얌전히 듣기를 택했다. - 그분이 좋은 보호자는 아니었지. 게다가 좋은 예시조차 없었다. 그러니 두려운 것이다. 부모자식은 어떤 방향으로건 닮기 마련이고… 이것은 극복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잘못하면 네게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줄 것 같았어. 아이의 기억은 아직 덜 굳힌 흙과 같아서, 작은 충격에도 오랜 흠집이 남으며 이사야는 그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이사야의 말에 리넛은 마음에 있던 묘한 감정이 그럭저럭 풀리는 듯 했다. 그렇기에 괜스레 조금 강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것 참 바보같은 걱정이었네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무슨 유리공예도 아니고. -… -조심하시는게 지금보다 오히려 더 불편했었다구요. -…. 이사야는 스윽 시선을 피했다가, 이어지는 리넛의 말에 다시 리넛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래?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마음일텐데. 이사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넛의 말을 이어 들었다. -저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었거든요. -호그와트? -네.
리넛은 물잔에 담긴 물을 한번에 마셨다. -그때 이후로, 가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뭔가 잘못되면 그게 내 탓인거 같기도 하고. 전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서…. 얼버무리려는 듯 리넛은 웅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가, 이사야가 제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것을 보았다. 그는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리넛은 제가 학교서 힘들었던 기억이나, 가끔 느끼는 위기감이나, 이것저것 자신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딱히 엄청난 비밀도 아니건만, 이렇게까지 낱낱이 털어놓는 것은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심지어 그는 레니샤도 아닌데….
- 하여간 가끔 턱. 막히는 기분일 때가 있어요,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 턱 막히는 기분. - 물론 제 이야기는 이사야랑은 다른 경우긴 하지만, 그런게 아닐까 싶어서요. 머리로는 알아도, 그게 마음은… - 무슨 말인지 알겠어. 리넛은 모든 말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쓸데없는 것까지 말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그러한 마음 때문인지 괜스레 이사야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이사야의 이야기도 해줘요. -내 이야기? -제 이야기만 했으니 불공평하잖아요.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해주기 싫으면 말고요. -싫은건 아니지만… -그러면 해주세요. 이사야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은 분명하지만 아직 저녁시간까지는 여유가 남아있었다. 말을 두어번 돌려보려다 리넛에게 타박을 받고는 결국 이사야는 제 이야기를 적당히 순화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물은적도 없고, 굳이 나서서 이야기 하는 성향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매우 낮선 순간이었다.
그 날이 지나고 이사야는 서재에서 두어번정도 더 리넛과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때가 되어 리넛을 다시 데려가겠다는 편지가 날라왔다.
매우 안타깝게도 레니샤가 아니라 테런스의 편지였다. 이사야가 느끼기에 이쯤이면 복수는 안해도 될 듯 했다. 고생이시군… 리넛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기뻐하면서도 아쉬워했다. -여기에만 있는 책들이 있잖아요.
이사야는 리넛을 위해 빌려줄 수 있는 책 몇권을 챙겨주었다. 다프넨은 집요정이 만든 간식거리를 몇개 챙겨주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짐을 챙겨 셋이 나가니 테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들을 위해 가볍게 자기 소개시간을 갖고 악수를 나누었다. 이사야와 테런스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네 집은 처음 와보는 걸. -와서 좋을 것도 없는 곳인걸요. -리넛을 봐주느라 고생 많았어. -… 뭐. 나쁘지 않았어요. 그렇게 이사야는 답했다.
-이 어두운 저택에 머무는 것도 여기까지네요. -책은 다 읽으면 부엉이로 보내. 리넛은 고개를 끄덕이곤 테런스 옆에 붙었다. 이동을 위해서였다. 저택 주위엔 보호마법이 맴돌고 있어서, 순간이동을 통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테런스가 지팡이를 휘두르기 직전에 리넛은 손을 흔들었다.
-또 놀러 올게요. 그리고 휘릭,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또 놀러와.
사라진 허공에 이사야는 그렇게 답했다. 뒤에서 다프넨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사야는 어쩐지 불쾌했다.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갈게. 애가 돌아올 때가 돼서. -그래. 수고 했다. 둘은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휴가도 오늘까지 였지. 이사야의 머릿속은 다시 일거리들로 가득 찼다.
테런스가 돌아왔을 때테런스는 일이 얼추 정리가 되고 나서야 리넛을 데리러 갈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큰 사건이 벌어졌는지 레니샤와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고민하던 테런스는 한참 전에 미리 합의해둔 대로 하기로 했다. 몇 사례 비슷한 일을 거치며 차근차근 개정된 합의사항이었다.
테런스가 생각하기에 리넛이 이사야의 저택에서 지냈다는 건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다.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의외라기보다는…. 가끔 나오는 대책 없는 면 정도의 느낌이었다. 자세히는 들은 바가 없어 몰라도 그네들의 비범한 가정사가 이사야에게도 있었고,
테런스가 여기기에 그건 잠깐이라면 몰라도 같이 지낼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낸다면 제법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졸업 이후로 시간이 한참 지나기는 했어도 이사야는 종종 만날 때마다 느끼기를, 여전히 이상한 곳에서 어리숙했다.
그러나 리넛을 데리러 갔을 때 만난 이사야는 생각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적어도 미묘한 불편함 정도나 곧 불편이 해소된다는 점에서 기인한 안도 정도를 예상했었으므로 테런스는 내심 의아해하고 있었다. 리넛도 마찬가지로 제법 편안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으리라.
테런스는 레니샤와 리넛이 사는 집 근처의 골목으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리넛이 먼저 현관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 따로 포트키를 이용해 레니샤의 집 내부로 이동했다. 테런스가 자주 드나드는 게 외부로 드러나서 공연한 오해를 사게 되는 건 피하자는 합의였다.
테런스의 집은 리넛이 와서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리넛도 계속 집에 머무르는 쪽이 보다 편할 것이므로 취한 타협책이었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은 테런스는 생각에 잠겼다. 텔레비전 채널은 대충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뭔가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니겠는가. 높은 확률로 서로의 가정사나 성장환경을 주제로 한 내용일 것이다. 적당한 영화를 방영하는 채널에서 리모컨을 멈춘 테런스는 하품을 하며 시청하기 시작했다. 뭐… 해피엔딩이면 좋은 거지.
테런스는 나흘쯤 레니샤의 집에서 출근하고 레니샤의 집으로 퇴근했다. 별달리 할 것은 없었고, 해봐야 적당히 장을 봐두고 리넛의 식사를 돌보는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서 테런스와 레니샤의 의견이 같았었다. 청소년은 가만히 두면 높은 확률로 오레오 쿠키 따위로 일주일 식단을 채운다.
거실 소파에서 지내는 일은 썩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테런스는 마법사답게 마법으로 해결할 줄 알았다. 공동 보호자쯤이 되고 나서 마법 관련 행동이 많아졌다. 자주 쓰지 않아서 방치하던 순간이동도 동반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다시 연습했고, 생활 보조 마법도 새로 익혔다.
그 나흘 사이에 이사야의 부엉이를 보기도 했다. 못 보던 부엉이인지라 생각해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어딘지 낯이 익었다. 따로 연락을 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은 모양이었다. 레니샤에게 언급을 할까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이 정도는 어차피 레니샤도 보면 알 것이다.
토요일 저녁쯤이 되어서야 돌아온 레니샤는 다소 초췌한 낯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퇴근을… 한 달쯤 못한 건가? 저런. 테런스는 떠나기 전에 마법 세계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는 훌륭한 오러에게 식사 정도는 차려주기로 했다. 미리 끓여둔 스튜를 데우는 정도였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었지만, 옷자락이 살짝 두드러진 걸 보니 안쪽으로 붕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이렌에게 한 소리 듣고 왔을 테니 테런스는 자비롭게 생략해주기로 했다. 레니샤의 몰골이 자비를 부르고 있기는 했다. 먹고 씻고 침대 위로 엎어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방문을 닫아줬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혹시 모르니 리넛에게 레니샤에 대한 것을 몇 가지 당부했다. 이틀쯤 지나서도 여전히 저 모양이면 연락해. 나한테 할 필요는 없고 이쪽으로. 이렌의 연락처를 리넛에게 건네주고 테런스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하지만 리넛은 바로 눈치챘다. 레니샤의 지인인 이렌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하, 아하. 테런스는 자비로웠다. 반만.
레니샤까지 돌아오고 나면레니샤는 꼬박 하루를 기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렸는데 여전히 한밤중이라서, 레니샤는 자기가 한두시간 정도 잤다고 착각할 뻔했다. 리넛이 날짜가 바뀌었고 다시 또 곧 바뀔 예정이라고 알려줬고, 레니샤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아차렸다...
주방에 가보니 역시, 테런스가 끓여주고 간 스튜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레니샤는 오레오 쿠키로 연명하지 않고 챙겨주는 것을 착하게 받아먹은 청소년의 머리를 살짝 토닥여주고 날이 밝으면 테리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에 차려 먹을 음식을 준비해 둔 뒤, (리넛이 더이상 스튜는 안 돼요! 라고 비명 질렀다.) 레니샤는 욕실에 들어가 옷을 걷고 상처를 살폈다. 음~ 이렌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레니샤는 자가 진단을 마치고 침착하게 붕대를 갈았다.
피가 스민 붕대는 소멸 마법으로 처리했다. 리넛이 보면 놀랄지도 모른다. 양치소세를 마치고 리넛의 방에 가보니, 침대에 파묻혀 있던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레니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밌게 지냈어?" 리넛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요." 리넛은 그렇게만 말했고, 레니샤는 낮게 웃었다. "뭐, 그래. 그냥 집을 며칠 비운다고 퉁치기엔 좀… 위험한 상황이지." 가까이 다가가 곁에 앉으니 리넛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잘 보였다. 짐작하건대 그것은 약간의 불안과 걱정, 그리고 의심이었다.
"이제 내 직업이 어떤 직업인지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됐겠지? 그런 상황은 또 올 거야. 걱정은 그때로 미뤄두는 게 어때." 레니샤는 자신이 안전히 돌아왔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불안과 걱정이 가시길 바랐고, 다음을 기약함으로써 그런 감정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다시 없는 게 제일이긴 하겠지만 세상일이야 항상 멋대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리넛은 달리 대꾸는 안 했지만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엣킨슨 저택은… 길을 잃기 쉬운 구조였어요." 그리고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레니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럼.
"집요정도 있었고요." 그야 그렇겠지. 또 고개를 끄덕이자 리넛이 결국 한숨을 쉬고 털어놨다. 좋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좀 이상한 곳이었어요. 이 말에는 레니샤도 도리없이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통증이 엄습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웃음을 마무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리넛은 한참을 엣킨슨저가 어떤 공간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니샤는 그 저택에 가봤기 때문에 리넛이 어느 방에 머물렀는지도 파악했고, 어딜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 반면에 어딜 갈 수 없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사야가 리넛을 예의주시한 게 틀림없었다.
서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레니샤도 다소 놀랐다. 이사야는 거기에 리넛을 들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적잖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짐작이 맞는다면 그것도 함께. 레니샤는 기회를 보다가 리넛을 쿡 찔러봤다. "중요한 게 빠졌는걸." "?" "이사야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구나."
리넛은 본인이 이사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린 것 같았다. "오, 물론 그분은… 최선을 다해주셨어요. 이사야도 래번클로라고 했었나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레니샤는 리넛의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이 몹시 신중하게 고른 말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며 내줬던 숙제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치는 아이를 보아하니… 그 서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대강 감이 왔다. 이건 정말 기대하지 않은 부수적인 무언가였다. 레니샤가 이사야에게 리넛을 맡긴 건 돌봄이 아닌 보호에 주안을 뒀기에 나온 솔루션이었기 때문이다.
또, 레니샤는 리넛이 이사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리넛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건 직접 허락받았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잠들 때까지 종알거리던 리넛이 마침내 조용해지고 나서 레니샤는 제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일이 흘러간 양상이 편지로 넘길만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레니샤는 이런 기준에 아주 엄격했다. 날이 밝았고, 레니샤는 우선 테리에게 전화를 걸어 리넛을 데리고 돌아와 준 것과 그 애와 자신에게 베푼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테리는 아주 여상한 태도로 인사를 받다가, 문득 물었다. "너 밖이야?"
도시 소음이 흘러든 모양이었다. 어어, 갈 곳이 있어서… 테런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선심 쓴다는 투로 얘기했다. "리넛에게 이렌의 연락처를 줬어." "아 멀린… 금방 들어가. 이건 직접 가야 할 일이라서 그래…" 레니샤는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 가는데." "이사야한테…." "오." 테리는 그 이상 잔소리를 더 하지 않았다. 레니샤가 제 말의 저의를 알아챘다는 것도 이유였을 것이고, 그로서도 이사야에게 직접 가봐야 한다는 말엔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야 테리는 이사야와 리넛의 사이에 흐르던 기류를 직접 눈으로 봤으니까. "이렇게 빨리?"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현역이라고." "아니, 내 말은 좀 나중에 가 봐도 좋지 않냐는 거였어." "탕비실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군."
서둘러 찾아가 봐야 할 이유란 사실 별것이 아니라 사무실 복귀였다. 직장인이 사는 게 그렇다. 레니샤는 부상에 부담을 덜기 위해 최대한 머글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갈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한 뒤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저만치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보였다. 리넛이 착하게도 고즈넉하다고 표현한.
이사야는 테리의 인수인계 이후로 한숨 돌린 모양인지 평온하고 태연한 태도로 레니샤를 맞았다. 레니샤는 다과를 내오겠다는 집요정을 멈춰 세워 들고 온 쇼핑백을 건넸다. "뭐예요?" "체리 타르트." "?" "이렌이 보증하는 베이커리의 원톱 메뉴. 아무튼 감사 표시를 위해 온 건데 빈손으로 오겠니."
이사야는 그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니샤는 그 표정을 읽어낼 줄 알았다. 불편해하고 있네. 재미있는 녀석 같으니. 집요정이 체리 타르트에 어울리는 차를 내주었다. 레니샤는 입술을 축이고 이사야의 표정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솔직히… 제가 크게 뭘 한 건 아닌데요."
레니샤는 '아 알지, 했다면 리넛이 했겠지.' 하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듣고 있다는 티만 내며 체리 타르트를 잘라내는데 열중하는 척하자, 이사야가 한마디 더 했다. "손이 많이 가는 애도 아니었고요." 타르트 맛이 끝내줬다. '아무렴. 너보다 덜 간단다.'
레니샤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과 속마음을 완벽히 따로 놀리면서 이사야를 살살 털어냈다. 이 현역 오러는 십수년간 알고 지낸 동창을 상대로 취조 심문 기술을 응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확실히 이사야가 테런스에 비해 수월했다.)
그리고 리넛이 여기서 지내는 동안 일어난 일이 제 직감과 짐작 그리고 추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아 보였다. (전적으로 레니샤 입장에서.) 레니샤가 셈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뭐 크게 기대하고 너한테 맡긴 게 아니었거든?"
이사야의 얼굴이 쪼끔 무너졌다. (잘 아는 표정이었다. 뭐냐, 억하심정이라고) "나는 전적으로 이 방공호를 믿었던 건데…." (방공호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가림막이 드리워진 어느 액자 뒷편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고 이사야가 재빠르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선배 제발 말 좀-" "너도 믿을 만 하구나.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 "-네?" 레니샤가 거침없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척척 외투와 스카프가 날아와 레니샤의 팔을 꿰고 목에 감겼다. "어 고마웠다고." 레니샤는 얼른 말을 바꿔 대꾸하고 이만 가야겠다며 간밤에 자가 진단을 내렸던 부상 핑계를 댔다.
이사야가 쫓아 나오며 아니 그 전에 한 말 뭐냐고 따져 물었지만 레니샤는 남은 타르트 보관법으로 응수하며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나도 그럴 일 없었으면 한다고. 근데 세상일이란 게 스페어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더라… 그건 그렇고. "…진짜 괜찮아 보이잖아? 참나. 테리도 좋아하겠네."
눈으로 보니 더 확연했다. 쌍방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선택지를 밀어둘 이유는... 하나도 없지. 레니샤는 상황과 시간에 떠밀려 선택했던 것이 의외로 최선책에 준하는 차선책이다고 재평가한 뒤 집으로 향했다. 테리한테 오늘 본 거 얘기해줘야지. 흐하핫하악 웃다 말고 환부를 감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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