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르는 성 안의 길을 따라 비질을 하다 말고 허리를 폈다. 손잡이 끄트머리에 손깍지를 껴 짚고 거기 턱을 얹으니, 산등성 위까지 내려앉은 무거운 눈구름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떠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몇 주간은 볕을 보기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이젠 그도 잘 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앞에 멈췄다. 아이나르는 자세를 고치지 않은 채로 시선만 내려 제 앞에 선 이를 응시했다.
푸른 눈과 금빛 눈이 마주쳤다. 티타냐는 긴 속눈썹 한 번 팔락이지 않은 채로 한참 아이나르를 바라보다 그가 자세를 바로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따라와. 골짜기에 갈 거야.”
아이나르는 잠자코 빗자루를 내려놓고 티타냐의 뒤를 좇았다. 티타냐의 보폭에 맞춰 또 바닥에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티타냐가 굳이 다른 이 아닌 그를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서로가 불편해서?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티타냐에게는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도와줄만한 이들이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그를 찾아왔다는 것은….
“왜, 밀로나 벨라가 아니라? 아니면 체첸 경은. 레인저들도 있을 텐데.”
그가 괜한 말을 덧붙여도 티타냐에게 정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엄마랑 밀로는 타운에 내려갔잖아. 벨라는 그저께부터 기침하고 있고. 체첸 경은 기사들이랑 초소 눈 치우느라 바쁘고. 레인저들은 장벽 무너진 곳으로 차출돼서 지금 다 돌아버리기 직전인데 누굴 빼내. 불만이면 네가 삼촌을 찾아내.”
물론 티타냐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조목조목 알차게 굴러가고 있는(예스페로는 예외로 치자.) 칼리아의 인력을 짚어가며 지금 이 순간 네가 이 성에서 가장 한가하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아이나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순순히 티타냐를 뒤따랐다. 그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망토 안쪽에 어린 담비를 품고 성을 나섰다. 사냥철이 끝난 뒤에 불법 포획된 개체로, 성에서 보호하던 녀석들이었다. 아이나르는 슬쩍 망토자락을 들춰 담비를 확인했다.
“그냥 봄까지 성에서 돌봐도 되는 거 아니야?” “무리로 돌아가지 못하면 번식을 못 하잖아.” “…중요해?” “은 담비는 개체수가 얼마 안 남았어. 매년 왕가에 가죽을 보내왔으니까… 못해도 너만큼은 중요할 걸.”
계속 딴지를 걸자 짜증이 났는지, 티타냐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아이나르는 티타냐의 표현이 본심보다 순화된 표현이란 사실을 눈치 챘다. 그는 한술 더 뜨는 것으로 반격할까 하다가, 스무 살도 더 먹고 여섯 살 어린 이복누이를 상대로 펼치는 입씨름 치고는 다분히 유치하다 싶어 관뒀다. 티타냐는 아이나르가 조용해지자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야생동물의 흔적을 추적했고, 담비의 서식지를 찾아 계곡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한참 신중하게 주위를 돌아본 뒤, 티타냐가 먼저 데리고 온 담비 둘 중 덜 다쳤던, 그래서 좀 더 완벽하게 회복한 녀석을 슬쩍 풀어 내려주었다. 녀석은 티타냐의 주위를 맴돌다가, 아이나르에게로 다가가 킥킥거리며 앞발을 뻗었다.
“풀어줘. 같이 돌아갈 수 있게.”
티타냐가 말했고, 아이나르는 붙들고 있던 담비를 내려놓았다. 형제일거라 추측했는데, 맞는 모양이었다. 성에서 치료받은 덕분에 충분히 회복하고 성질도 되찾은 녀석들은 신나서 엷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좋아, 임무 완료 맞지? 돌아가, 이제.”
아이나르가 크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러나 티타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안쪽으로 걸으며 대꾸했다.
“아직 안 돼. 채취해가야 할 샘플이 많아─”
아이나르로서는 환장할 대답이었겠지만, 티타냐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오늘 같은 기회가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은 앞으로 최소 몇 주는 그치지 않을 것이고, 장벽 보수는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올 기회는 물론 따라와 줄 사람도 부족한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숲이 생장을 멈춰 주나, 채취기를 놓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일이다. 온실과 병원 업무가 마비된다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이나르 역시 그곳의 연구와 약품의 수혜자였으므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티타냐를 좇았다.
티타냐는 마에스터 게마가 부탁한 것들을 찾아 숲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다가 문득 아이나르의 움직임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장서 길을 여는 것이나, 자리를 옮길 때마다 흔적을 선별해 지우고 남기는 것이나, 운신이 자연스러웠다. 티타냐도 익히 아는 방식이었다.
“요새 외성 밖으로 나돌던 이유가 있었구나. 레인저들과 함께 지냈어?” “티가 나나?”
반문하는 아이나르의 어조에서 티타냐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가 제 발로 찾아간 걸까, 아니면 체첸 경의 조치가 있었을까. 그것까지야 티타냐가 알 수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레인저들은 항상 부족했고, 레인저가 되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간다면 가장 필요할 능력을 가장 빠르게 갖출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무엇보다…
“…안 보인다 싶었지. 좋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이나르가 순순히 긍정했다. 피차 성 안에서 부딪히느니 떨어져 있는 편이 평화로운 사이임을 서로가 잘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배운 걸 활용하기 최적의 조건이고. 십분 발휘해봐.” “여부가 있겠습니까.”
떨떠름한 미소와 흔쾌한 미소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티타냐에게 짚인 뒤로 아이나르는 배운 요령을 발휘하는데 숨기거나 주저함이 없었다. 대개 레인저들이 얼마 만에 한 사람 몫을 해내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티타냐가 보기에 습득 속도가 제법 빠른 듯했다. 덕분에 산행이 기대 이상으로 편해져 이것저것 채집한 것이 덩달아 많아졌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사위가 고요해졌을 때였다. 맹금류라도 떴나 싶어 고개를 치켜든 티타냐의 눈에 절벽 위에서 토톡 굴러 떨어지는 작은 눈덩어리가 보였다.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급한 외마디가 울렸다.
“야!”
티타냐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나르가 자신을 저렇게 부를 리 없는데.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뒤엉킨 채 몇 바퀴를 굴렀고, 황망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에야 아이나르가 자신을 감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석하게도 감상 따위에 젖을 새가 없었다.
“뛰어!”
티타냐가 외쳤고, 아이나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사태는 절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사람 다 모를 리 없었다. 경사면을 따라 무너지는 눈과 얼음 덩어리들이 아이나르와 티타냐가 구르기 전 서있던 자리부터 쓸어 덮었다.
티타냐가 달리면서 생각했다. 쏟아져 내리는 눈 속에 파묻히면 끝이다.
아이나르 역시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 속도로는 저 붕괴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 “잡아!”
두 사람의 인영이 한 순간에 눈더미 안쪽으로 사라졌다. 땅은 한참을 울다 잠잠해졌고, 쓸려 내려간 숲의 잔해 위를 선회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만이 메아리쳤다.
헉, 헉… 가쁜 호흡으로 두 사람의 숨결이 한데 뒤섞였다. 동굴 안쪽으로 뛰어들자마자 입구가 막혀버리는 바람에 새어드는 빛이 없어 안쪽은 캄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맥박이 가라앉자 사위가 고요해졌고, 티타냐는 바닥을 짚은 손을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움직였다. 손에 무언가 걸렸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나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서 그게 그의 손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좁아.” 티타냐가 얼른 손을 거두고 한 마디 했다.
“큰 짐승의 보금자리보다 안전해.” 아이나르는 불평하지 말라는 듯 대꾸했다.
“움직이는 거 조심하란 뜻이었어.” 티타냐가 아이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노려보며 받아쳤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사물의 윤곽이 대강 분간이 갈 정도로 눈에 어둠이 익자, 티타냐는 몸을 일으켜 입구로 다가가 쌓인 눈과 얼음덩어리를 두들기고 밀어봤다. 제 힘으로 뚫기는 어림도 없으리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좋아. 적어도 식수가 모자랄 일은 없겠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고 굴 안쪽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빙글 돌린 순간이었다. 옷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내려다보자, 아이나르가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가지 마.” “무슨 소리야. 나가든 버티든 해야 할 것 아냐.”
고립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모를 리 없는 이가 황당한 말을 뱉자 티타냐는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위험해.”
얼마나 버텨야할지 계산하려면 이 안쪽을 확인해야 하는데… 문득, 티타냐는 여전히 자신의 옷자락을 붙든 채 박제되기라도 한 듯 가만히 있는 아이나르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평소의 아이나르라면 만약의 위험 앞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이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티타냐를 앞세우지도 않는다는 건.
“너. 다쳤구나.” “…….”
아이나르가 티타냐의 눈길을 피했다. 습관처럼 움직인 손을 도로 거두지도 못하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이복형제가 몹시 낯설었다. 다쳤어도 너보단 이 상황에 유리하다며 능청스럽게 대꾸해야지. 뭐 하는 거야.
티타냐는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아이나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 눈을 맞출 수 있는 사이는 아니래도 상처와 약점을 내놓을 수 있는 사이라는 건 몹시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니 골절은 아닌 모양인데. 탈골인가….’
사실 그만한 눈사태에서 빠져나오는 대가로 고작 어깨 한 쪽을 내 준 거라면 정말, 정말이지 싼 값을 치른 셈이었다. 심지어 그게 자신을 감싸느라 치른 대가라면 자신은 싸다고도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티타냐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려뒀던 가방을 뒤적였다.
“다시는 칼 못 쥐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이거나 물고 있어.”
한편으로 아이나르는 칼 같은 건 사실 상관없었기에… 티타냐의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사실 검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냥 그건 필요해서 배운 거였지. 그것도 제게 필요한 게 아니라 스카디에서 필요로 했으니까… 밀로가 필요로 했으니까 배운 거였다고. 어쨌건 칼을 잡지 못하는 손은 다른 것도 잡지 못할 테니까, 그는 순순히 티타냐가 제 입에 욱여넣은 천 뭉치를 악물었다. 그리고 격통에 대비했다.
티타냐는 정확하게 아이나르의 어깨를 맞춰냈지만 열이 오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해열제로 쓰는 약초를 짓씹어 아이나르의 입에 넣어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